도겸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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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겸은 삼국시대 인물로, 자는 겸(謙)이며 단양 사람이다. 유학을 공부하고 관리가 되어 효렴으로 천거되기도 했다. 황건적의 난 당시 서주자사로 임명되어 황건적을 토벌했고, 동탁 사후에는 제후 연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조조의 서주 침공으로 인해 유비에게 서주를 넘겨주고 사망했다. 도겸은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진수의 비판처럼 감정적인 행동으로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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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겸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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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도겸 |
본명 | 도겸 (陶謙) |
자 | 공조 (恭祖) |
출생 | 132년 |
사망 | 194년 (62세) |
출생지 | 당도현, 안후이성 |
사망지 | 탄청현, 산둥성 |
관직 및 작위 | |
최종 관직 | 서주목 (徐州牧) |
기타 관직 | 안동장군 (安東將軍) 서주자사 (徐州刺史) |
작위 | 역양후 (溧陽侯)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감부인 (甘夫人) |
자녀 | 도상 (陶商) 도응 (陶應) |
기타 정보 | |
활동 시기 | 후한 말기 |
로마자 표기 | |
중국어 병음 | Táo Qiān |
웨이드-자일스 | Tʻao2-Chʻien1 |
중고음 | dɑu kʰem |
상고음 | *bl'uː kʰeːm |
2. 생애
도겸은 단양군 단양현(丹陽縣) 사람으로,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유생이 되었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지만 남에게 구속받지 않고 자랐다. 열넷의 나이에 고을 아이들의 추종을 받았으며, 옛 창오태수 간공(甘公)은 도겸을 만나 기이하게 여겨 자기 사위로 삼았다.[36]
도겸은 주와 군에서 벼슬을 했고, 무재로 천거되어 노현령으로 재직했다. 이후 유주자사, 의랑을 역임했다.[35] 서강이 변경을 침략하여 황보숭이 정서장군이 되었을 때, 도겸은 부름을 받아 양무도위가 되었고, 황보숭과 함께 강족을 쳐부쉈다.[36] 거기장군 장온을 따라 서쪽으로 가 반란을 일으킨 한수를 토벌했다.[35] 장온은 도겸을 불러 후히 대우했으나, 도겸은 장온에게 속으로 불복하였고, 돌아와서는 술자리에서 장온을 욕하였다. 장온은 분노하여 도겸을 변방으로 유배보냈으나, 어떤 사람이 장온에게 도겸을 풀어줄 것을 말하여 도겸은 유배가던 도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도겸에 대한 장온의 대우는 처음과 같았다.[36]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도겸은 서주자사에 임명되어 이를 토벌했다.[35] 동탁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도겸은 주준과 손을 잡고 정예 병력 3천과 군자를 후원했다.[37]
동탁은 왕윤에게 암살당했으나, 동탁의 부장인 이각과 곽사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윤을 죽이고 조정을 장악했다. 도겸은 주준을 추대하고, 주변의 명사, 주목, 태수들과 연합하여 이각과 곽사를 치고 황제를 받들어 모시고자 했다. 그리하여 공융, 정현, 응소, 복건 등과 공동명의로 주준에게 상주했다. 그러나 주준은 직접 조정에 들어가려는 계획이었으므로 이를 사양해, 도겸의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37]
도겸은 조정에 사자를 보내 샛길로 가서 공물을 바치게 했으므로, 안동장군·서주목으로 옮겼고, 율양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도겸은 형벌과 행정을 다스리지 않고, 도의를 위배하고 감정에 따라 행동했다. 당시 조욱은 서주의 명사로 충성스럽고 정직하였으나 도겸과 소원해져서 멀리 광릉태수로 나갔고, 조굉 등은 간사한 소인배였는데 도겸은 이들과 친하여 일을 맡기니 선량한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35][38]
원술과 원소가 대립하자, 도겸은 공손찬의 명으로 발간현에 주둔하며 고당의 유비, 평원의 선경과 함께 원소를 압박했으나, 모두 원소와 조조에게 격파당했다.[40]
193년, 하비성에서 궐선(闕宣)이라는 자가 황제를 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도겸은 궐선과 함께 약탈을 일삼다가[40] 궐선을 죽이고 그 군대를 거두었다.[35]
같은 해,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도겸의 군사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책임은 도겸에게 돌아갔고,[36][38] 조조는 서주를 침공하여 도겸을 정벌하기에 이르렀다. 194년 봄, 조조는 10여 성을 추가로 공략했고, 도겸은 팽성에서 패배하여 담성으로 후퇴했다.[35][38] 조조는 담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38] 군량이 부족했으며,[35] 청주자사 전해가 구원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36] 퇴각했다. 이때 조조가 죽인 백성들로 인해 사수가 막혀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35][38]
도겸은 전해가 데려온 유비에게 단양병 4천을 주고, 예주자사로 추대하여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40][41] 194년, 조조는 다시 서주를 침공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키고, 낭야를 넘어 동해까지 공격했다. 조조는 지나간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도겸은 낭야와 동해의 여러 현이 유린당하는 것에 겁을 먹고 고향인 단양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에서 장막, 장초 형제와 진궁 등이 여포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조조군이 철수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도겸은 서주 관할하의 광릉군 강도현으로 이주해 온 손책을 꺼려, 손책은 도겸을 피해 원술을 섬기고 가족은 양주 오군 곡아현으로 이주시켰다.[42]
194년(흥평 원년), 조조는 다시 도겸을 공격하여 낭야와 동해의 여러 현을 함락시켰고, 도겸은 고향인 단양으로 도주하려 했다. 마침,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연주를 점거하는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조는 여포를 치러 돌아갔다.[35][38]
도겸은 이 해에 병으로 사망했다.[35][38] 향년 63세였으며, 장소 등은 그를 애도하는 글을 지었다.[43] 도겸은 병이 깊어졌을 때, 별가 미축에게 유비가 서주를 통치하도록 유언했다.[41][44]
2. 1. 어린 시절과 관직 생활
단양군 단양현(丹陽縣) 사람이다.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유생이 되었고,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에게 구속받지 않았다. 열넷에 고을 아이들의 추종을 받았으며, 옛 창오태수 간공(甘公)은 도겸을 만나 그를 기이하게 여겨 자기 사위로 삼았다.[36]주와 군에서 벼슬을 했고, 무재로 천거되어 노현령으로 재직했다. 이후 유주자사, 의랑을 역임했다.[35] 서강이 변경을 침략하여 황보숭이 정서장군이 되었을 때, 도겸은 부름을 받아 양무도위가 되었고, 황보숭과 함께 강족을 쳐부쉈다.[36] 거기장군 장온을 따라 서쪽으로 가 반란을 일으킨 한수를 토벌했다.[35] 장온은 도겸을 불러 후히 대우했으나, 도겸은 장온에게 속으로 불복하였고, 돌아와서는 술자리에서 장온을 욕하였다. 장온은 분노하여 도겸을 변방으로 유배보냈으나, 어떤 사람이 장온에게 도겸을 풀어줄 것을 말하여 도겸은 유배가던 도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도겸에 대한 장온의 대우는 처음과 같았다.[36]
도겸은 단양군(현재의 마안산 안후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여요현의 현령을 지냈으며, 도겸이 어렸을 때 사망했다. 젊은 시절, 그는 학구적이고 정직한 인물로 알려졌다. 한나라 조정에서 그는 모재(茂才)로 천거되었고,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며, 비서실에서 근무했고, 서현령으로도 재직했다.[5][6]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그는 유주자사로 임명되었고, 장온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하며 량주 반란 동안 그와 함께 북서쪽 변경으로 갔다. 이때 서부 부족들이 토지를 약탈했고, 황보숭이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도겸은 그를 따라 양무도위로 복무했다. 이 작전에서 그들은 강족을 크게 격파했다. 변장과 한수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겸은 장온과 함께했지만, 장온이 재직하는 동안 그를 경멸했다. 군대가 돌아온 연회에서 장온은 도겸에게 술을 따르도록 명령했는데, 도겸은 장온을 비롯한 다른 군사 장교들을 모욕했고, 이로 인해 장온은 분노하여 도겸을 변경으로 유배시켰다. 그의 부하의 조언에 따라, 그는 도겸의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를 용서했다. 도겸은 자신의 모욕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장온은 그에 대한 좋은 대우를 재개하라는 격려를 받았고, 따라서 그들의 관계는 새롭게 시작되었다.[7][8]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즐겨 배우고[20], 이윽고 태학에 들어갔다. 지방으로 돌아와 군, 주의 관리로 일했으며, 무재로 추천되었다[21]。 이후, 노현현령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유주자사로 승진했다.
중평 2년(185년), 중앙으로 소환되어 의랑이 되었고, 한수 등을 토벌하기 위해 장온의 지휘 아래 량주로 파견되었다[22]。
2. 2. 황건적의 난 진압과 서주자사 부임
도겸은 서주에서 황건적이 일어나자, 서주자사에 임명되어 이를 토벌했다.[35] 동탁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도와 각지의 주와 군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당시 조정은 서울을 장안으로 옮겨 사방과 단절된 상태였다. 동탁은 주준을 낙양에 남겨뒀는데, 주준은 관동의 반동탁 연합군과 호응하여 하남을 탈환하고 황폐해진 하남을 떠나 중모(영천군의 속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도겸은 주준과 손을 잡고 정예 병력 3천과 군자를 후원했다.[37]동탁은 왕윤에게 암살당했으나, 동탁의 부장인 이각과 곽사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윤을 죽이고 조정을 장악했다. 도겸은 주준을 추대하고, 주변의 명사, 주목, 태수들과 연합하여 이각과 곽사를 치고 황제를 받들어 모시고자 했다. 그리하여 공융, 정현, 응소, 복건 등과 공동명의로 주준에게 상주했다. 그러나 주준은 직접 조정에 들어가려는 계획이었으므로 이를 사양해, 도겸의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37]
도겸은 조정에 사자를 보내 샛길로 가서 공물을 바치게 했으므로, 안동장군·서주목으로 옮겼고, 율양후에 봉해졌다. 이때 서주는 백성들이 부유하고 미곡이 많이 있었으므로, 유랑하는 백성들이 많이 서주로 갔다. 그러나 도겸은 형벌과 행정을 다스리지 않고, 도의를 위배하고 감정에 따라 행동했다. 당시 조욱은 서주의 명사로 충성스럽고 정직하였으나 도겸과 소원해져서 멀리 광릉태수로 나갔고, 조굉 등은 간사한 소인배였는데 도겸은 이들과 친하여 일을 맡기니 선량한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35][38] 당시 기근이 들자, 진등을 전농교위로 삼았고, 진등이 농업 발전에 힘써 곡식이 풍성히 쌓였다.[39]
2. 3. 동탁 사후 혼란과 제후 연합 시도
동탁이 정권을 잡아 천하가 혼란스러워지자, 각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천자는 서울을 장안으로 옮겨 사방과 단절되었다. 동탁은 주준을 낙양에 남겨뒀는데, 주준은 관동의 반(反)동탁 연합군과 손을 잡고 하남을 되찾았다. 이후 황폐해진 하남을 떠나 중모(영천군의 속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도겸은 주준과 손을 잡고 정예 병력 3천과 군수 물자를 지원했다.[37]동탁은 왕윤에게 암살당했으나, 동탁의 부장인 이각과 곽사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윤을 죽이고 조정을 장악했다. 도겸은 주준을 태사로 추대하고, 주변의 명사, 주목, 태수들과 연합하여 이각과 곽사를 치고 황제를 받들어 모시고자 했다. 그리하여 공융, 정현 (후한), 응소, 복건 등과 공동 명의로 주준에게 상주했다. 그러나 주준은 직접 조정에 들어가려는 계획이었으므로 이를 사양해, 도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37]
도겸은 조정에 사자를 보내 샛길로 가서 공물을 바치게 했으므로, 안동장군·서주목으로 임명되었고, 율양후에 봉해졌다. 당시 서주는 백성들이 부유하고 곡식이 많아 유랑하는 백성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도겸은 형벌과 행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고, 도의에 어긋나며 감정에 따라 행동했다. 당시 조욱은 서주의 명사로 충성스럽고 정직하였으나 도겸과 사이가 멀어져 광릉태수로 나갔고, 조굉 등은 간사한 소인배였는데 도겸은 이들과 친하여 일을 맡기니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35][38]
2. 4. 원소, 조조와의 대립과 서주 침공
원술과 원소가 대립하자, 도겸은 공손찬의 명으로 발간현에 주둔하며 고당의 유비, 평원의 선경과 함께 원소를 압박했으나, 모두 원소와 조조에게 격파당했다.[40]193년, 하비성에서 궐선(闕宣)이라는 자가 황제를 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도겸은 궐선과 함께 약탈을 일삼다가[40] 궐선을 죽이고 그 군대를 거두었다.[35] 혹은 궐선과 합종했다가 궐선을 죽이고 그 군대를 흡수했다고도 한다.[38]
같은 해,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도겸의 군사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겸 휘하의 장수가 다스리는 낭야로 피난했던 조숭이 부하들의 재물 욕심으로 살해되었다는 설과,[38] 조조가 조숭을 영접하려 하자 도겸이 도위 장개에게 호송을 명했는데, 장개가 중간에 조숭을 죽이고 재물을 훔쳐 회남으로 달아났다는 설이 있다.[36] 이 사건의 책임은 도겸에게 돌아갔고,[36][38] 조조는 서주를 침공하여 도겸을 정벌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조조는 도겸을 공격하여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키며 응전하지 않았다. 194년 봄, 조조는 10여 성을 추가로 공략했고, 도겸은 팽성에서 패배하여 담성으로 후퇴했다.[35][38] 조조는 담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38] 군량이 부족했으며,[35] 청주자사 전해가 구원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36] 퇴각했다. 이때 조조가 죽인 백성들로 인해 사수가 막혀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35][38] 조조는 퇴각하면서 취려, 저릉, 하구를 함락시키고 도륙하여 수십만 명을 죽였으며, 닭과 개까지 몰살시켜 다섯 현의 성읍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장안에서 이각의 난을 피해 도겸에게 의탁했던 사람들도 모두 죽었다.[38]
도겸은 전해가 데려온 유비에게 단양병 4천을 주고, 예주자사로 추대하여 소패에 주둔하게 했다.[40][41]
194년, 조조는 다시 서주를 침공하여 다섯 성을 함락시키고, 낭야를 넘어 동해까지 공격했다. 담 동쪽에 주둔하던 조표와 유비는 조조에게 격파당했다. 조조는 지나간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도겸은 낭야와 동해의 여러 현이 유린당하는 것에 겁을 먹고 고향인 단양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에서 장막, 장초 형제와 진궁 등이 여포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조조군이 철수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2. 5. 원술과의 관계
도겸은 서주 관할하의 광릉군 강도현으로 이주해 온 손책을 꺼려, 손책은 도겸을 피해 자신은 원술을 섬기고 가족은 양주 오군 곡아현으로 이주시켰다.[42] 이후 원술이 육강에게 서주를 치기 위해 군량미 3천을 빌리려 한 것으로 보아 원술과의 제휴도 깨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손책이 어머니를 모시고자 여범을 파견하자 이를 원술의 정탐으로 여기고 고문하기도 했다.2. 6. 조조의 재침과 죽음
194년(흥평 원년), 조조는 다시 도겸을 공격하여 낭야와 동해의 여러 현을 함락시켰고, 도겸은 고향인 단양으로 도주하려 했다. 마침,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연주를 점거하는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조는 여포를 치러 돌아갔다. 이때 조조는 양분현을 지나가면서 사람들을 살육했다.[35][38]도겸은 이 해에 병으로 사망했다.[35][38] 향년 63세였으며, 장소 등은 그를 애도하는 글을 지었다.[43] 도겸은 병이 깊어졌을 때, 별가 미축에게 유비가 서주를 통치하도록 유언했다.[41][44]
3. 도겸을 섬긴 사람들
도겸은 왕랑, 주치, 진등과 같이 훗날 후한 말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의 경력을 시작하는 데 기여했다.[10] 그러나 제융, 조굉, 과 같이 부도덕한 인물들과 힘을 합치기도 했고, 충성스럽고 유능한 부하인 조욱을 신뢰하지 않았다.[10] 장소와 여범처럼 도겸의 요청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은 투옥되기도 했다.[10]
4. 도겸의 친족관계
5. 평가
도겸은 동아시아 나이 기준으로 194년에 63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두 아들 도상과 도영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장소는 다른 관리들과 함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를 지었다.[13]
도겸은 심각한 병을 앓게 되자 부하인 미축에게 "이 땅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유비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죽은 후 미축과 진등은 유비를 서주 자사로 초빙했다. 유비는 처음에는 거절하고 원술에게 자리를 제안했지만, 공융이 결국 그를 설득하여 받아들이게 했다.[14]
- '''진수의 평'''
- *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을 지키지 않고, 감정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사법과 행정의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해를 입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한 혼란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다."[32]
- * "이유도 모른 채 근심 속에 죽어갔다."[33]
- * "주와 군에 의지했지만, 범인이라도 이 정도 심각한 일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논할 가치가 없다."[34]
- '''위소의 『오서』의 평'''
- * "도겸은 성품이 강직하고, 세상의 규범을 지키며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 * (감공) "좋은 인상을 지녔다. 장래에 반드시 큰 성공을 거둘 것이다."
- * (장소) "미덕과 무용과 지성을 겸비했으며, 성품이 강직했고, 그 통치는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졌다."
참조
[1]
서적
Tao Qian's biography in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2]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08
[3]
서적
Sanguozhi vol. 08
[4]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08
[5]
서적
Sanguozhi vol. 08
[6]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08
[7]
서적
Sanguozhi vol. 08
[8]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08
[9]
서적
Sanguozhi vol. 08
[10]
서적
Sanguozhi vol. 08
[11]
서적
Sanguozhi vol.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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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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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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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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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ree Kingdoms
Foreign Languages Press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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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TOTAL WAR: THREE KINGDOMS WARLORD LEGENDS – CAO CAO
https://www.totalwar[...]
2018-10-26
[17]
웹사이트
TOTAL WAR: THREE KINGDOMS – MANDATE OF HEAVEN FAQ
https://www.totalwar[...]
2019-12-17
[18]
문서
盧弼の『三国志集解』
[19]
문서
魏志「陶謙伝」が引く『呉書』
[20]
문서
魏志「陶謙伝」が引く『呉書』
[21]
문서
「陶謙伝」が引く『呉書』
[22]
문서
「陶謙伝」が引く『呉書』
[23]
문서
魏志「臧覇伝」
[24]
문서
呉志「朱治伝」
[25]
문서
『後漢書』「朱儁伝」
[26]
문서
その有様は次のようであったとされる。
[27]
문서
自分勝手に皇帝を名乗った宗教指導者。
[28]
문서
曹嵩殺害の経緯について
[29]
문서
『後漢書』「陶謙伝」
[30]
논문
柿沼陽平「後漢末の群雄の経済基盤と財政補填策」
2018
[31]
문서
蜀志「先主伝」
[32]
문서
原文「背道任情、刑政失和、良善多被其害、由是漸乱」
[33]
문서
原文「昏乱而憂死」
[34]
문서
公孫瓚・公孫度・張楊とあわせての評価。
[35]
삼국지
진수: 《[[삼국지]]》 권8 위서 제8 2공손도4장전
[36]
서적
오서
[37]
서적
후한서 권71 열전제61 중 주준전
https://zh.wikisourc[...]
[38]
서적
후한서 권73 열전제63 중 도겸전
[39]
서적
선현행장
https://zh.wikisourc[...]
[40]
서적
삼국지 권1 위서제1 무제기
https://zh.wikisourc[...]
[41]
서적
삼국지 권32 촉서제2 선주전
https://zh.wikisourc[...]
[42]
서적
삼국지 권46 오서제1 손파로토역전
https://zh.wikisourc[...]
[43]
서적
(진수의 《삼국지》 2공손도4장전 배송지의 주석에서 재인용)
[44]
서적
삼국지 권38 촉서제8 허미손간이진전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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